20만 년 인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성립된 시기는 100년이 안 되었다. 사회는 그동안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성서도 그런 시각에서 기록되었기에, 여성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 신학의 입장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이 여성학자들의 중요한 모토다. 여성 한 명이 당하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굴레와 사회적 제도와 관습 속에서 발생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여성도 다양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입장을 갖게 된다.  ‘어린 여성과 나이 든 여성’,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가난한 나라의 여성과 부자 나라의 여성’, ‘배운 여성과 배우지 못한 여성’, ‘결혼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과 많이 낳지 않는 여성’, ‘이혼했다가 재혼한 여성’ 등 다양하다.  그래서 다양성을 다양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서 대부분의 언어는 남성적이지만, ‘암탉이 병아리들을 자기의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너희를 불러 모으지 않았느냐’라는 하나님의 자기 암탉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의 여성적 이미지들을 발굴할 수 있고, 성서 속 여성들의 역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여성신학의 성경읽기 방법

여성 신학의 성경 읽기 방법의 첫 번째는 그 여성을 그런 역할로 설정한 사회적 배경을 연구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그 배경 속에서 그 여성이 수동적으로 억압만 당했는지, 아니면 주체적으로 활동했지를 연구한다. 세 번째, ‘여자들은 잠잠하라.’처럼, 여성 억압적으로 보이는 본문들(수요사경회 122강 참고)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 본문을 너무 강력한 자기주장으로 인해 오히려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부 특수한 여성들에게 ‘다 듣고 이야기하자.’라고 권면한 것으로 재해석하면, 오히려 고린도교회는 여성들이 활발하게 자기 의견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교회였음을 알게 되고,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오히려 고린도교회 여성들은 더 선진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돕는 배필의 재해석

하나님이 하와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표현에서 ‘돕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다.’처럼, 유독 하나님께 많이 쓰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때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 중, 누가 더 높은가? 종과 주인의 관계로 보면 마치 주인이 높고 종이 낮은 것 같지만, 어른과 아이의 관계(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면 아이들은 도움을 받고 어른은 도움을 준다. 그러면 이때 ‘돕는 배필’은 부모 같은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의심의 해석학

이처럼 여성 신학은 그동안 성서를 보편적 진리의 말씀으로 읽어왔다고 하지만, 남성 중심적이었으며, 독자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그 결과, 여성 신학자들은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들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의심하라고 들은 적은 없다. 그런데 독자의 해석에 따라서 성서를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지금까지 성서를 읽고 해석해 온 모든 것은 성서의 말씀이 아니라 독자들의 해석일 수도 있다. 내가 읽으면 다를 수 있다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가톨릭교회가 독점했던 성서 해석권을 마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개개인에게 준 것만큼 강력했다. 기존에는 성서를 이런 방식으로만 해석해 왔으나, 현대 독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므로, 기존의 해석이 언제나 진리라고만 수용하는 것이 옳은지 의심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34장에서 야곱과 레아의 외동딸 디나가 성폭행당했을 때, 디나의 오빠들은 디나와 결혼하겠다던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제안하고, 그들을 모두 몰살시킨다. 이 사건을 의심의 해석학으로 읽으면, ‘왜 여기서 디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왜 이 모든 것을 야곱과 오빠 중, 그 누구도 디나의 의견은 묻지 않고, 디나와 의논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 이야기(눅10:38-42 참고)에서 마르다는 무엇에 분주했는가? 일하지 말라가 아니라, 일하는 것도 좋은 것이기에 거기에 집중했으면 좋았지만, 마리아 쪽에 참견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 본문도 의심의 해석학으로 보면, ‘왜 나사로는 등장도 하지 않는가?’ ‘왜 예수님 앞에서 말씀도 안 듣고, 마르다 곁에서 일도 안 하는가?’ 심지어 예수님이 나사로를 위해서 울어준 유일한 친구인데, 예수님이 오실 때 그는 어디 있었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더 큰 시각에서 보면, ‘이 이야기가 혹시 주도적으로 활발하게 일했던 마르다 같은 여성들의 입김을 잠재우고 조용히 예수님 앞에서 말씀이나 듣고 앉아있으라고 말하기 위해 쓰였던 것이 아닌가?’ 등의 가능성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선포의 해석학

나아가 이런 ‘의심의 해석학’을 넘어 ‘선포의 해석학’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동안 출애굽의 영웅은 모세라고 주야장천 선포해 왔지만, 십브라와 부아, 모세의 엄마와 누이, 그리고 애굽의 공주 같은 여성들이 상당한 주역이었음을 선포할 수 있다. 그리고 마가복음서를 마르코(남자)가 아닌 마르카(여자)가 썼다고 선포할 수도 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것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베드로의 장모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을 때, 예수님이 가서 치유하자, 그녀는 일어나서 시중들었다. 이때 ‘시중들었다’라는 단어는 ‘디아코니아’로 ‘섬기다’라는 뜻이다. 섬김과 관련된 내용은 이때부터 시작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제자도를 가르치시며, 세상 통치자들은 지배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섬겨야 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여성들에게만 모두 섬긴다는 말을 붙였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열두 제자 모두 도망갔지만, 끝까지 따라온 사람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섬김 사역인데, 그 사역을 하는 것은 여자들뿐이다. 또 마가복음은 이방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그 문을 연 것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사건이다. 그녀의 섬기는 마음에 예수님은 놀라고 그녀의 딸을 치유한다, 이후 예수님의 사역은 완전히 이방 사역으로 일관된다. 또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행동 중 하나는 정결법에 의해 사람들을 차별하고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깬 것이다. 이런 행동에 영향을 준 사람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다. 12년 동안 부정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잡음으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었고, 이후 예수님은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안 되는 율법을 깨고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는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한 것도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사역을 재현할 수 있었던 힘은 부활에서 온다. 그런데 부활의 첫 증인도 모두 여자다. 그러므로 ‘선포의 해석학’으로 마가복음서를 보면, 열두 제자들은 권력 다툼이나 하며 예수님의 뜻도 모르는 철부지였고, 섬김의 주체는 여성이었다고 선포할 수도 있다.

회상 해석학

그다음은 ‘회상 해석학’이다. ‘나도 그때 그런 적이 있었지’, ‘나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어’, ‘내가 교회를 세우는데 얼마나 헌신하며 내가 섬겼는데’ 등, 교회에서 여성들의 경험이 나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이것이 예수님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 역할을 더 잘했구나. 내가 진짜 제자였다.’라는 생각까지 이른다. 그래서 마가는 열두 제자에게 ‘마세테스(제자)’라는 단어를 안 붙이고, 그냥 열둘이라고만 부른다. 반면에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로페니키아 여인 한 명뿐이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할 때, 자기 시간과 돈과 재능을 바친 것은 여성들이었다(눅8:1-3 참고).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이때도 우리 교회랑 똑같았네’라고 과거 여성들의 경험을 현재의 경험으로 더 잘 회상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막달라마리아를 용서하는 본문(요8:1-11 참고)은 자기 죄를 생각하고 누군가를 정죄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만 읽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의심의 해석학’으로 읽으면, 간음은 여자 혼자 한 것이 아닌데, 여자만 잡혀 왔고 남자는 풀려났음을 발견하게 된다(4절).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여성들은 자기의 경험을 회상하게 된다. 이것이 ‘회상의 해석학’, ‘의심의 해석학’, ‘선포의 해석학’이다.

창조적 상상의 해석학

마지막으로,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이미 독자의 상상력이 제한되어 있기에, 대부분은 진보적으로 새로운 사유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여성 신학이 마지막으로 하는 해석학은 ‘창조적 상상의 해석학’이다.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강조했는데(갈3:26-29 참고), 이것은 당시에 굉장한 충격이었다. 먼저 27절에서 세례를 말하고, 29절에서 할례를 말하면서, 이제는 할례에서 세례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할례는 여성이 할 수 없기에 그 자체가 여성 배제였고, 남자들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에서 세례로 넘어간 것 자체가 이미 새로운 창조적 비전을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은 가부장적 사회가 주도권을 지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성과 자연이 동시에 핍박과 착취, 약탈당했다. 그래서 여성과 자연을 엮어서 함께 연구하는 분야를 ‘에코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날의 기후 위기도 새롭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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