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선한 능력으로', '세상 다 변하고'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성서는 과연 퀴어(LGBTQ)를 공격하는가? 아니면 성서는 퀴어를 위로하고 지지하는가? 성서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흔히 동성애와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구절은 6개밖에 없다. 그러면 66권의 성서에서 6개의 구절이 성서 전체의 가치들을 뒤엎는가?

소수에 대한 다수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

다수와 소수 사이에서 다수자는 낯선 것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같이, 남자와 여자를 철저하게 분리하던 사회였고, ‘신체발부수지부모’처럼, 머리카락도 자르면 안 되었다. 만약 21세기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가면, 그 사람은 사회를 문란하게 한 죄로 감옥에 갈 것이다. 이처럼 한때는 당연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100년 후, 지금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상황을 그렇게 볼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여전히 다수가 느끼는 묘한 불편함이 있고, 성 정체성, 생존과 번식, 그리고 사랑이라는 가장 깊은 죄를 건드리는 문제로 인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낯선 것에서 오는 근원적인 감정 반응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고 품위 있게 죽고 싶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약과 수술을 강요한다면, 그러한 태도가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지만,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를 잃기 싫은 자기 욕심의 결과이다. 자기가 가진 죽음(상실과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다.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다. 자기감정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자신에게서 어떠한 방어기제가 나오는지를 먼저 성찰하면, 훨씬 더 폭넓고, 불편함을 덜 느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절대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성소수자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 자기 안에 있는 공포심(호모 포비아)을 상대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해석

하나님은 근원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자, 전능의 하나님이다. 사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보다 사랑에 더 우위를 두시기에, 전능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전능에 더 힘을 두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과 폭력적 하나님도 용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아닌 상대방에게만 적용한다.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창19:1-28 참고)에서 ‘상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로, ‘알다’라는 의미인데, 성서에서는 ‘성관계를 갖다’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한다고 할 때도 ‘야다’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원래 동성애자여서 새로운 남자들과 성행위를 하겠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이성애자인데 상대를 모욕 주기 위해서 성행위를 요구한 것인가? 설사 그들이 동성애적 성향이더라도, 두 딸을 끌어다가 집단으로 성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집단 강간으로 범죄적 행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한 이유가 동성애 때문인가? 아니면 강간 때문인가? 강간의 이유가 더 강하다. 또, 이것을 기록한 시대의 성적 지향이 오늘날 말하는 성적 지향과 같다고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들은 모두 동성애자였나? 딸을 내준 것으로 볼 때 그렇지 않다. 이 사람들은 최소 양성애자이고, 이성애자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폭력을 행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당대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쪽에게 여성 역할을 맡기고 강제 성행위를 함으로써, 굴복시키려는 의식이었다(영화 ‘부러진 화살’ 참고).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21세기에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타고났거나,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읽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그것은 성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를 설명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교만한 사람들을 비교한다. 이것은 힘센 사람이 힘 약한 사람에게 하던 짓이다(겔16:49-50 참고). 이사야서는 더 노골적으로 소돔의 멸망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폭력 때문이었다고 고발한다(사1:10-17 참고). 누가복음에서도 소돔을 언급하며 환대와 냉대를 고발한다(눅10:10-12 참고).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낯선 도시에 온 두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텃세 부리면서 자기 밑에 굴복시키려던 사람들을 향해 고발하는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구약성서에서 동성애 관련 율법은 두 개로(레18:22; 20:13 참고), 레즈비언 관련 율법은 없다. 그것은 전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경우와 신전창기의 경우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다신교 사회에서는 하늘이 비를 뿌려주는 것을 정액이라 생각했고, 땅은 정액을 받는 여성의 자궁이라고 생각했다. 둘의 교합을 통해 다산하기 위한 풍습으로써, 신들의 성적 교합을 더 자극해야 했다. 그래서 남자와 남자 또는 여자와 여자가 과도한 성행위를 보여줌으로써 우상을 숭배하던 상황을, 레위기가 고발한 것이다.

바울 서신서의 재해석

바울 시대에 출산 없는 성행위(자위, 피임, 질외사정 등)는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역리였지만(롬1:26-27 참고), 오늘날은 자연스러운 행위다. 그래서 오늘날은 출산 없는 성행위에 대해서 죄라고 말하지 않지만, 반대로 성서의 노예 제도나 일부다처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바울의 편지를 근거로 이 시대에 여성 목사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유일하게 교육받은 여성은 성 노동자였다. 남성을 상대하며 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미소년을 교육하고 그들과 성행위를 했는데, 당시 문화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들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애자임에도 아내와는 출산만을 위해서 성행위를 해야 하므로, 자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성 노동자 여성이나 미소년을 찾던 것을 바울이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시대적 한계와 제한된 지식으로 결정한 말을 오늘날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서 전체에서 강조하는 사랑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독자 반응 비평으로 살펴보는 성서

독자반응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안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인다는 것이다. 이성애자들에게 잘 안 보이지만 동성애자들에게는 보이는 구절이 있다. 일례로,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남성성으로 그린다. 그래서 출애굽부터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때도 하나님은 첫 번째 왕 사울의 외모를 보고 좋아했다(삼상9:1-2 참고). 그리고 두 번째 왕 다윗을 뽑을 때도, 고대 사회에서 장군이 자기의 무기 병사를 뽑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뽑는데(삼상16:12 참고), 동성애자 입장에서는 이 방식이 그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뽑을 때와 같기에, 이 구절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성애자 입장에서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 지나가면 눈이 돌아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예로, 초대 교부들은 선악과 이야기를 이성애자들의 ‘성적인 죄의 문제’로 읽어냈지만, 다른 눈으로 읽은 교부들은 ‘탐식’으로 보았다. 성적인 것이 죄가 아니라, 많이 먹는 것이 죄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서의 경우, 성소수자들은 사회에서 다수에게 당한 슬픔이 있기에, 깊은 우울의 상처를 해소하는 시로 읽힌다.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살해하려고 할 때, 부모에게 이성애자로 살라고 강요받던 동성애자 자녀가 이삭의 입장이 되면 동병상련을 느낄 것이다.

성소수자의 정체성

결국 성소수자들은 누구를 죽이거나 악을 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으로 사랑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종교인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각각의 정체성은 자기가 갖는 것이다. 그것이 나쁜 행동이 아니라면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예를 들어, 한국에서 정상이라고 인식하는 가정이 부모와 아이 둘이라고 할 때, 오늘날 500만이 넘는 1인 가구, 혼자 사는 청년, 비혼 가정은 결손 가정인가? 아이를 안 낳으면 결손 가정인가?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사유가 얼마나 현대사회를 포괄하지 못하는 폭력적 단어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두를 포괄하는 사회가 더 괜찮은 사회인가? 아니면 그런 인간을 다 죽이거나, 사회에서 불이익을 주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인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불편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먼저 이것을 생각하라. 첫째, 성적 다양성 문제와 관련된 책을 한 번이라도 충분히 읽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둘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때, 사랑의 관점이 어디까지,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심사숙고해본 적이 있나?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근원적인 감정으로부터 낯선 것을 경계하며 혐오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낯선 것으로 인해 생기는 미묘한 감정적 문제는 스스로 더 수용력을 넓혀야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너무 빨리 판단해서 남을 정죄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에게 낯선 것을 줄여가면서 익숙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품을 넓히고 깊이 있는 경지까지 가야 한다. 그 경지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런 경지까지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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