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민경우 비대위원, 32년전 김지하의 데자부

 민경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사진 연합뉴스)
 민경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사진 연합뉴스)

1991년 봄,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학교를 지나 은평구 응암동 응암오거리에 서야 하는 73번 버스는 자주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버스를 타지 못하면 몇십 분을 걸어서 집에 가야 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난감한 상황. 당시 새로 나온 긴 회색 공중전화에 100원 동전 넣고 “엄마! 이상하게 버스가 안 와. 걸어갈게” 하고는 다시 100원짜리 몇 개를 오락실에 넣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쩌다 중간에 버스 몇 대가 한꺼번에 올 때가 있었는데, 버스에는 “강경대를 살려내라!”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강경대가 누군데 살려내라는 거지? 죽었다는 이야기?, 오지 않던 73번 버스 안에 왜 그런 스티커가 있었지?”

중1 소년 머릿속에 새겨진 의문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풀렸다. 역사는 그해 봄을 ‘분신 정국’으로 기록했다. 1991년. ‘서울의 봄’ 후 11년, 6월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야권분열로 전두환 친구 노태우가 당선돼 집권 4년 차 공안정국을 이끌어 가던 해. 강경대와 김귀정을 잃고 난 절망은 분신으로 이어졌다.

1991년 5월 5일 故 김지하 시인의 조선일보 칼럼 
1991년 5월 5일 故 김지하 시인의 조선일보 칼럼 

故 김지하 시인 표현을 따르면 ‘죽음의 굿판’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애타게 부르던 시인의 조선일보 칼럼 하나로 역시 민주주의를 애타게 부르던  1991년 봄의  청춘들은 죽음을 찬미하는 세력으로 규정됐다. 김지하가 아니었다면 그 효과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김지하와 조선일보의 결합은 단숨에 사태를 반전시켰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목숨까지 바친 청춘들은 죽음의 굿판 제물로 강등됐다. 박승희, 김영균, 김철수, 김기설, 이정순, 윤용하, 천세용, 정상순. 지금도 이들은 아직 지하에서 역사의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후 외대 6·3사태 뒤 이어진 치열한 언론플레이로 노태우 정부는 다시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이듬해 12월 민주자유당은 다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청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은 전두환 친구의 위기 탈출에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노인들은 어서 빨리 돌아가셔야 한다”라는 발언으로 60년 가까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민경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그의 인선 소식을 보고 32년 전 김지하 그리고 지난날의 민경우가 떠올랐다.

소위 통일운동 진영의 핵심 운동가였던 그는 2019년 ‘조국사태’를 거치며 사상적 전환기를 거친다. 그 뒤로는 주로 자신과 같은 386 운동권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 이후 사실상 보수우익 성향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한동훈 호는, 6월항쟁의 해 198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 민경우, 1995년부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 민경우 그리고 2007년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팀장 민경우를 영입하면서 지난 4반세기 보수정권 저항 운동 모두를 공격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사상적 지향이 바뀌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변화라면 당연히 권장할 일이다. 민 위원의 선택을 존중한다. 문제는 청년 민경우의 열정이 윤석열 정권 위기 타개에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32년 전 김지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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