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비용이 증가할 조짐

윤석열 정부가 9·19 군사합의를 무력화한 이후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북한은 11월 21일에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천리마-1형‘에 탑재하여 성공적으로 발사를 하였다. 이를 두고 우리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국무회의를 열어 9·19 군사합의의 비행금지 구역을 정한 일부 조항을 무력화하기로 결정하자, 북한은 23일에 “합의를 전면 파기”한다며 군사합의 이전으로 “군사 조치를 회복한다”고 발표하였다. 남북 분단사에서 지난 몇 년처럼 군사분계선(MDL)과 북방한계선(NLL) 일대가 평온했던 시기도 없었다. 그러나 합의가 파기된 직후에 북한은 남북 합의에 따라 철거되었던 전방 소초(GP)를 복원하는 군사행동에 즉시 착수하였고, 비무장 경비를 정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도 권총으로 무장한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도 무인기(UAV)와 정찰기를 군사분계선 일대에 새로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정부의 대북정책을 북한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라고 매도하면서 오직 힘에 의한 응징을 외치며 한반도 긴장 고조를 불사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반도 군사 정세는 남북 군사합의 체결 이전으로 퇴행하고 있어 향후 우리 사회에 더 많은 안보비용을 부과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군사합의가 정부의 주장대로 우리 군의 군사 활동에 족쇄가 되는 불합리한 합의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 주장의 이면에는 드론, 정찰기, 인공위성에서 제공되는 첨단 기계 정보가 더 많을수록 대한민국 안보가 튼튼해질 것이라는 단순한 인식이 있다. 10월 초에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의 감시와 정찰 수단을 갖고도 기습을 허용한 사례를 보라.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암호해독과 감청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인공위성으로 조종되는 기관총을 광망이 설치된 장벽에 촘촘하게 배치하였다. 그 누구도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한 이스라엘이 기습당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기계 정보가 초래할 부작용들

이스라엘의 철옹성 같은 분리 장벽을 하마스는 어떻게 돌파했을까? 공개된 영상을 보면 배회 탄약을 장착한 날개가 4개 달린 상업용 드론이 장벽 위로 비행하여 이스라엘 전차를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패러 글라이드에 하마스 전사가 탑승하여 이스라엘 마을에 침투하는 장면도 나온다. 다른 한 편으로 선박에 의한 해상 침투도 병행되었다. 이런 전쟁 양상은 군사 장비가 아니라 대부분 상업용으로 개발된 민간 장비다. 맥주와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개발된 쿼드콥터가 전쟁 무기로 돌변한 것인데, 이는 지난해 2월에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키이우 북부에서 러시아 전차와 장갑차를 교란하던 양상과 거의 같다. 즉 하마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철저히 학습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전술을 개발한 셈이다. 하마스의 기습은 군사 무기가 아니라 비군사적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다며 각종 드론과 인공위성을 추가로 투입한다고 하지만, 이런 기계 정보가 안보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각종 감시정찰 자산도 전쟁에 전혀 사용될 것 같지 않았던 민간 장비가 동원될 때 의외로 대응력이 취약하다. 작년 12월에북한이 조잡한 성능의 무인기 5대를 내려보냈지만, 우리는 한 대도 요격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계 정보에 의존하는 경계 태세는 인간의 판단을 퇴화시키는 부작용도 보여 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차량에 위성항법(GPS)가 장착되고 나서 운전자들은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렸고, 우리 대부분은 길을 찾는 데 장님이 되고 말았다.

감시정찰 패권국이 정보에 실패

인공위성과 정찰 정보가 엄청난 데이터를 쏟아내고 인공지능이 이를 분석해 주는 현대에 와서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장 상황을 인식하는 의지와 능력이 저하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미국만 해도 2001년 7월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무너뜨리고 카불을 점령하기까지 정보기관은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카불이 함락되기 일주일 전에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의회 증언에서 “카불은 사이공이 아니다”라며 아프간은 30만 정규군을 가진 정부로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듬해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쳐들어오기 일주일 전에 의회 증언에서 “키이우는 72시간을 버티지 못한다”며 사흘 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증언했다. 망하는 정부는 안 망한다고 하고, 안 망하는 정부는 망한다는 미국의 군 서열 1위는 퇴임할 때까지 이에 대해 해명하지 못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하기 5일 전인 10월 2일에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에서 “지난 20년 이래 중동은 가장 평화로워졌다”며 “가자 지구에서의 군사 위협은 현저히 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있고 나서 5일 후에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래 50년 만에 가장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연이은 실패를 보면 첨단 기계 정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개입하여 능동적으로 상상하고 판단하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안보는 얼마나 많은 숫자의 감시정찰 수단이 있는가가 아니라 상대국의 집단 심리, 즉 분노와 상실, 충동의 감정을 제대로 읽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드론이나 인공위성은 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2018년 평양에서 체결된 남북 군사합의서는 첨단 기계 정보가 제공하지 않는 군사적 통제의 규범을 제공한다. 이 합의서가 존재함으로써 합의를 위반할 경우 상대방의 의도가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만큼 적은 비용으로 북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어떤 규범도 없는 무정부와 혼란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의도를 오판하기 쉽기 때문에 엄청난 기계 정보에도 불구하고 안보는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9·19 군사합의는 남과 북이 서로의 군사행동을 자제하는 일종의 완충구역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설령 국지적인 위기가 발생한다고 해도 남북은 위기관리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합의서는 1973년에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체결한 군비통제 규범인 헬싱키 협정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냉전 시기에 두 진영은, 이 협정을 통해 상호 군사적 투명성을 증진하고, 군사력을 통제하여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17년 후에 냉전이 종식되도록 한 평화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헬싱키 협정이 체결될 당시에도 이 협정이 군사 활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어 상대방에게 기만을 허용할 것이라는 반대가 상당했지만, 역사는 이러한 노력이 유럽에서 냉전을 종식하고 평화를 구축했음을 증명한다.

군사합의서 파기를 우려하는 동맹

군사합의서 파기에 대해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그 어떤 나라도 잘한 일이라고 찬성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10월의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합의서 무력화에 대한 의견을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에게 설명하자 미 측은 이에 대해 어떤 입장도 없이“잘 경청했다”고만 회의 상황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설명한 데 대해 잘 들었다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군사합의서 파기에 대한 우려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이 에이브러엄스 예비역 대장으로부터도 나왔다. 그는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군사합의 파기로 인한 규범의 공백에 대해 “우려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합의서가 무력화되어 판문점에 북한군이 권총으로 무장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중립국감시위원회의 스웨덴과 스위스 대표들은 공개적으로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두 장군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군사적 행동을 규율하는 약속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며 합의서 파기 이후 공동경비구역이 “훨씬 불안해졌다”고 밝혔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대만해협도 불안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굳이 기존의 합의까지 파기하면서 한반도를 불안하게 만드는 데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더 불안한 당사자는 우리나라 서북 해역 NLL 일대의 우리 주민들이다. 남북 군사합의 이후 조업 시간과 구역이 넓어져 소득이 증대된 어민들은 다시 긴장이 고조될 경우 삶의 질이 추락하게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또한 접경지역의 200만 주민들은 지난 박근혜 저우 시절에 남북 확성기와 전단 살포로 삶의 기반이 위협받던 시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번 평화가 파괴되고 삶이 불안해지면 누구도 이를 회복하거나 보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들은 남북 합의서 파기는 재앙이다. 이들은 남북 합의 체결 이전에 연평균 정전협정 위반 회수가 2백여 회에서 체결 이후 2회로 줄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군사합의서는 정전협정이 그 완충구역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여 한반도를 안정시킨 평화의 자산이자,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주변국의 우려와 국민의 삶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윤석열 정부가 합의서 무력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군사적 긴장 고조가 싫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긴장이 고조될수록 북한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 되는 것이고, 국내 정치적으로 불리할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 안보를 빙자하여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구 보수의 오랜 습관이다. 그 못된 병이 도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이후 5년간 평화의 진정한 가치를 격하게 체험하였다. 최고의 민생과 복지는 바로 평화다. 무엇보다 평화의 조건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국가는 번영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자신이 없는 권력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과 같은 퇴행과 실패의 길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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