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4일, KBS 신임 사장 박민은 뜬금없이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민은 “KBS가 공영방송으로서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했고 “신뢰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유감을 표한다”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시사저널이 올해 전문가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문가들의 36.4%는 KBS의 영향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고 일반인들의 45.2%도 KBS의 영향력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신뢰도 측면에서도 KBS는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전문가 대상 신뢰도 조사에서는 KBS는 27.6%로 MBC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뢰도 역시 34%로 MBC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전국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의 계부가, 아들이 그동안 방탕했다며, 아들을 대신해 사과한다며 눈물을 흘리는 이 괴랄한 장면. 이것이 2023년 한국 언론의 현실을 상징하는 모습이 됐다. KBS는 이 이상한 기자회견에 앞서 출연 중인 라디오 진행자들의 하차를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심지어 KBS 뉴스9의 메인 앵커도 마지막 인사 없이 갈아치워 버렸다. KBS의 무엇이 공정성을 훼손했고, 무엇이 신뢰를 상실하게 만든 원인인지 아직도 아는 사람이 없다. KBS 사장의 기자회견 당일 저녁 KBS 뉴스9는 공정성 상실의 원인으로 ‘오세훈 생태탕 보도’와 뉴스타파의 ‘김만배 인터뷰’ 인용 보도, 고 장자연 씨 사건과 관련된 윤지오 씨 인터뷰를 꼽았지만, 왜 이것이 불공정 보도인지 말하지 않았고. 이를 취재한 기자 그 당사자들에조차 경위를 묻지 않았다. 심지어 법원으로부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박철민의 ‘이재명 조폭 돈다발 보도’는 여기에 꼽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사장이 돌연 머리를 숙이며 공정방송을 약속한 지 한 달, 그 사이 KBS의 보도는 공정해졌는가? KBS의 지난 한 달간 뉴스 보도는 어땠을까? 11월 13일부터 12월 10일까지, KBS 뉴스9는 28번의 톱뉴스 중 6번을 북한 소식에 할애했다. 북한과 관련된 다자외교 소식이 3번이었고. 대통령의 발언이나 개각 발표 등 동정 보도가 3번이었다. 또한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과 관련된 감사 결과, 재판 결과 보도가 3번이었다.

정권에 유리할 만한 이슈가 대거 헤드라인에 배치됐지만, 언론사별로 사안의 중대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놓고 시비를 가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박민의 방송 한 달 만에 KBS에 생겨난 ‘독특한 시선’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지난 11월 20일 정부 전산망이 먹통이 됐을 때 KBS는 하루 만에 복구됐다는 보도를 톱뉴스로 냈다. 같은 날 MBC는 ‘이틀째 마비’, SBS는 ‘이틀째 장애’, 심지어 TV조선도 ‘이틀째 먹통’을 톱뉴스로 꼽았다.

부산 엑스포 유치가 수치(羞恥)가 된 그날, KBS 앵커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정부와 민간이 총력전을 펼쳤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서도 “다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경제 영토를 넓혔다는 평가도 나온다”는 정신 승리를 해 댔다.

그날 MBC 앵커는 “오늘 아침 엑스포 개최지 선정 소식 듣고 많이 당혹스러우셨을 것 같다”고 했고 SBS 앵커는 “박빙이라던 예측과는 달리 결선 투표는 가지도 못하고 일찍 승부가 결정됐다”고 했다. 심지어 TV조선도 앵커가 “너무 큰 표 차이 때문에 당혹스러웠다”고 평가했다. 사흘간 이어진 정부 행정망 먹통 사태가 KBS에는 하루 만에 해결됐다고 확인됐을 리 없고, 119대 29라는 참패가 KBS에만 희망이 됐을 리 없다. 정권이 지탄을 받을 만한, 부담스러운 사안을 다루는 KBS의 이 보도들은 신뢰도 1~2위를 다투던 언론 모범생 KBS가 포털에 흔하디흔한, 뻔하디뻔한 그저 그런 매체 중 하나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여부가 가려지지도 않은 사안을 두고 공정성이 훼손됐다며 머리를 조아린 박민이, 이 보도 이후 삼배구고두례를 하진 않는 한, KBS의 보도 공정성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 보조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확신할 것이고. 앞으로 박민이 KBS 사장으로 재직하는 시간 동안, 이 확신에 대한 증거들은 계속 쌓여 나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KBS는 국민의 신뢰를 얻어가고 있는가? 최근 TV로 메인뉴스를 정시에 시청하는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또한 KBS는 습관처럼 시청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시청률이 크게 출렁이진 않는다.

그러나 박민의 취임 후 KBS 뉴스9의 시청률은 완만하지만,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23년 10월24일 8%, 26일 8.6%, 30일 8.7%, 11월2일 8.4%, 11월6일 9.1%의 성적을 거둔 KBS 뉴스9는 13일 7.6%로 시작해 12월7일 7.7%로 최고점을 찍었다.

KBS 라디오 유튜브는 10월 16일에서 10월 22일엔 634만 회, 11월 6일일에서 11월 12일에는 534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나, 11월 13일에서 11월 19일에는 208만 회로, 절반 이상 급감했고, 11월 20일에서 11월 26일엔 188만 회, 11월 27일에서 12월 3일에는 218만 회를 기록했다. 구독자 수도 플레이보드 집계 기준 11월 6일 748위에서 12월 10일 798위로 떨어졌다. (미디어오늘 : 주진우·최경영·홍사훈 등 하차 이후 KBS라디오 유튜브 조회수 ‘급감’)

KBS의 사장 박민은 공정성을 회복해 국민의 신뢰를 찾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공정성도 국민의 신뢰로 잡지 못했다.

남은 박민의 1년.

박민의 방송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차피 대중들의 평가는 KBS 사장 임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박민과 친윤노조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파트너 역할을 잘 수행하면 무리 없이 제 세상을 누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민은 어차피 1년 임기의 사장이다. 박민은 전임 김의철 사장의 보궐로 들어왔고. 그 임기는 내년 12월까지다. 물론 차기 사장에 지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취임식도 열기 전 KBS를 피바다로 만든 박민이 임기 연장을 꿈꾼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2008년 정연주 사장을 내쫓고 점령군으로 들어온 18대 KBS 사장 이병순은 취임 3개월 후부터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미디어 포커스와 시사투나잇을 폐지했고 자신이 사장이 되는 걸 반대한 직원들을 징계했다. 당시 자사의 주요 방송인이었던 윤도현과 김제동, 정관용을 내쫓으며 손에 피를 묻혔다. 이병순도 정연주 사장의 보궐로 들어왔기에 차기 사장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고, 실제로 차기 사장 후보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결국 김인규에게 밀려났고 이렇다 할 족적도 남기지 않은 채 손에 피만 가득한, 언론 부역자 명단에 이름만 올렸다. 하물며 박민은 취임식도 열기 전에, 하나회 쿠데타처럼 방송장악을 시작했다. 주요 진행자들을 하차시키고 임명장도 받지 못한 간부들에게 그 통보를 맡기는 등 무리한 절차를 강행했다. 가을 개편, 봄 개편. 시간은 본인의 편이었음에도 굳이 무리한 조치를 이어갔다.

언론노조 KBS 본부는 박민을 편성법 위반으로 고발한다고 밝혔고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지금이야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하든 고발해서 검찰이 수사하든 모두 대통령의 영향력에 있을 것 같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총선은 당장 내년 4월이다.

총선이 지나면, 총선을 앞두고 KBS를 탱크로 밀어버리고 싶었던 ‘성명불상의 누군가’의 의지는 박민의 책임으로 오롯이 기록될 것이다. 이 책임을 지는 자는 박민이 될 것이고. 박민이 차기 KBS 사장이 될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박민은 제2의 이병순이 될 것이다. 그나마 이병순은 ‘KBS맨’이었지만, 박민은 KBS와 인연이 없다.

그 상황을 피해 보려 박민과 그의 간부들은 나름의 최선을 다해 KBS 뉴스9를 만들겠지만, 안타깝게도 KBS의 9의 영향력을 깎아 먹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가 실패했지만, 경제 지평을 넓혔다고 떠들어도 여론은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KBS 뉴스를 보느니 차라리 TV조선 뉴스를 보는 게 더 이득이 되는 세상에, 박민의 방송은 국민 앞에 설 자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부 보수 단체들의 흰소리에 불과했던 KBS의 수신료 거부 운동은 KBS 구성원들이 심각하게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KBS의 겨울은 시작됐다. 상투적이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온다. 박민과 그 간부들은 어차피 1년 뒤 관심밖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박민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KBS가 박민의 방송이 됐다고 한들, 더 이상 시간은 박민의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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