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더불어민주당에서 공개한 현수막을 두고 큰 논란이 있었다. 현수막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4월 총선을 앞두고 20·30세대의 표심을 잡기 위해 야심 차게 기획했다는 현수막이었다는데 정작 반응은 정반대였다. 당 내부에서조차도 ‘청년 비하’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수진영, 진보 진영 가릴 거 없이 정치권은 지금의 20·30세대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거대 담론이나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개인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오해다. 그런 생각은 정치적 메시지로, 현수막의 문구로, 선거 전략으로, 정책 공약으로 구현되는데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왜? 애초에 오해니까. 애초에 판단의 기반 자체가 틀렸으니 그 틀린 기반으로부터 나오는 전략이나 메시지나 공약이 효과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수의 여론조사를 보면 지금의 정치세력에 대해 20·30세대의 무관심 혹은 혐오 감정은 매우 드세다. 여론조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2030 세대에서 무당층 비율이 40%대를 넘나든다. 한국갤럽이 공개한 2024년 1월 둘째 주 여론조사에서 20대의 무당층 비율은 43%였고 30대는 38%였다. 거의 몇 개월째 이렇다. 지면의 한계로 한국갤럽을 기준으로만 이야기할 테지만, 다른 여론조사들도 20·30세대의 무당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20대 30대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도 논박한다. 과연 그럴까? 가령 똑같은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의 2018년 5월 첫째 주 여론조사 결과는 어떨까? 20대 무당층 비율은 35%이고 30대는 18%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과거인 2017년 5월 셋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찾아보면 20대의 무당층 비율은 23%이고, 30대는 16%다. 이 수치는 다른 세대와 비교했을 때 그리 튀는 수치가 아니었다. 당시 40대 무당층 비율도 13%였고, 50대 무당층 비율도 20%였으니까. 심지어 요즘도 어느 세대든 무당층 비율이 20%±5%p다. 즉, ‘20·30세대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명제는 사실이 아니란 뜻이다. 요 몇 년 사이에 20·30세대만 유독 정치 무관심층이 늘어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이야기다.

20·30세대가 정치 혐오하는 이유

이유가 뭘까? 몇 년 전에 비해 20·30세대가 ‘경제는 모르겠고 돈은 많고 싶은 욕망’과 ‘정치는 모르겠지만, 나는 잘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커졌기 때문일까?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사실 말이다. ‘나는 잘 살고 싶은 욕망’과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은 특정 세대만의 특징이 아니다. 당연히 모든 세대가 자기는 잘 살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만 잘 살게 해주면 정치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까닭은 정치권의 오해와 정반대이다. 정치가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의 정치가 ‘공동체에 이익’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게 오히려 더 문제다. 즉, 젊은 사람들은 정치권의 오해와 달리 사회와 공동체와 담론에 큰 관심이 있는데, 정치가 오히려 그 공적 영역을 더 망가뜨린다고 있다고 생각해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이니 ‘공정한 경쟁’이니 ‘반중 정서’니 하는 것들이 왜 뜨거웠겠는가? 그것이 ‘개인에게 이익’을 주고 말고 하는 영역의 문제인가? 전부 사회 구조적 담론이다.

현 정치권, 20·30세대와 통하는세계관 없어

젊은이들이 한국의 정치 세력에 심드렁한 까닭은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엇박자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보수정당의 가장 큰 세계관은 뭔가? ‘반공’이다. 흔히 인간은 젊은 시절에 세계관이 형성된다고들 한다. 보수정당의 주요 지지층이 누구인가? 60·70세대다. 그들이 젊은 시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뭐였는가? 전후 복구, 산업화,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에 대해 국가안보를 탄탄히 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일단 하나가 되어야 하는 그런 세계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이 나라를 지키고 일으켜 세웠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세계관은 뭔가? ‘반독재’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층은 40·50세대인데, 그들이 젊은 시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가? 군사독재 정부 타도, 민주주의 쟁취였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전두환 독재 정부를 몰아내고 피로써 이 나라에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문제는 2023년에도 두 정당은 그 세계관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와의 싸움’을 운운한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설정한 의제를 보라. ‘386운동권 청산’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어떤가? ‘검사 독재 정부 타도’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결국 ‘반공’과 ‘반독재’ 세계관의 변형일 뿐이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해보라. 세계 경제 10위권을 넘나드는 자본주의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무슨 ‘공산 전체주의와의 싸움’을 시대정신처럼 운운하고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권과 행정권을 남용하고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과연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 같은 ‘독재 정부’인가?

일단 윤석열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게 아니다. 군사 반란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 게다가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을 동원해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정권이 아무리 ‘특수부 검사’들을 동원해 정적 제거하느라 권한 남용을 한들, ‘공안부 검사’나 ‘형사부 검사’를 동원해 일반 국민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 가두진 못한다. 또 제아무리 방통위를 장악해 공중파 방송을 장악하려 해도 보도지침 내려보내 기자들 탄압하고 언론사 통폐합하는 짓은 못한다. 전두환 정부에선 후자를 했다. 물론 권력으로 정적 제거하려 드는 것도 하면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시도해도 전두환 때와 달리 법원에서 막힌다. 현 정부에서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권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국민적 심판의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그 반대는 어떤가? 정부 여당이 바로 직전까지 국민의 선택으로 집권했던 세력더러 ‘공산 전체주의’니 ‘반국가 세력’이니 하는 규정으로 명명하고 그들을 타도하겠다고 하면 유권자들이 뭐라고 생각 할까? 국민들이 60년대 70년대식 ‘반공’하라고 그들에게 표를 줬겠는가? 그런 이야기에 공명하는 건 그나마 그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60·70세대 밖에 없다.

지금의 민주당은 아직도 본인들이 젊었을 적 형성된 세계관인 ‘반독재’를 외치고 있고, 국민의힘은 ‘반공’을 외치고 있는데, 생각해보라. 지금의 20·30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 과연 ‘반공’과 ‘반독재’겠는가? 지금 20·30세대 앞에 높여있는 시대적 과제는 국민이 직접적으로 물리적 투쟁을 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되는 독재 정부가 아니다. 권한 남용을 하는 오만한 정권은 다음 선거에서 그들 스스로 심판해버리면 그만이다. 또한 이미 체제경쟁에서 이겨버린 ‘공산주의’ 같은 것은 그들 관심 목록에 있지도 않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는 ‘자본주의’ 때문에 힘들어 한다.

말하자면 지금 40·50세대와 60·70세대에게는 본인들의 세계관과 통하는 정당이 있는데, 20·30세대에게는 본인들의 세계관과 통하는 정당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반추 없이 겉핥기식으로 젊은 세대 유권자를 포섭하려 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았던 그런 현수막 같은 게 나온다. 청년세대와 소통을 하겠답시고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이 보여줬던 그런 치킨 맥주 쇼 같은 이벤트가 나온다. 당연히 20·30세대로부터 돌아오는 건 냉소뿐이다.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페미니즘 이슈에 젊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갈등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기득권 이슈’였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는 가부장제와 남성성이 기득권이었다. 그러니까 페미니즘 조류에 강하게 이입했다. 반대로 젊은 남성들에게는 요즘의 페미니즘이 기득권이다. 여성들을 억압하고 불평등을 야기하는 건 본인들이 아니라 기성세대 아저씨들인데, 페미니즘이 엉뚱하게 자기들을 탄압한다고 여겼다. 그 여성주의 기득권 때문에 본인들이 억압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뤘던가? 진보 진영은 ‘PC 주의’의 틀로 다뤘고, 보수진영은 ‘대안 우파’적 틀로 다뤘다. 갈등을 조정해 새로운 합의를 창출하는 게 정치의 본령인데, 젊은이들이 갈등하는 문제를 두고 ‘변화된 시대’의 ‘달라진 기준’에 대해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는 정치의 본령은 없었다.

미래 세대와의 지속적인 동맹 모색해야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정치권은 그런 식이다. 특정 세대의 갈등은 복합적인 사회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로 인한 병리적 현상이다. 하지만 정치는 그걸 들여다보질 않는다. 그 대신 정치적 쇼를 하거나 지원금을 주겠다는 식의 정책으로만 대응한다. 그들의 세계관에 가 닿으려 하기보다는, 그들을 속이려 들고 그들이 ‘이익’으로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얄팍한 고민만 하는 것이다. 각자 여전히 ‘반독재’와 ‘반공’ 세계관을 들고,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사회 문제’나 ‘거대 담론’에 관심이 없다고 착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2017년, 박근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던 이들의 최전방에 왜 20·30세대가 있었겠는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에 왜 그들이 공감했겠는가? 한때 80% 이상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던 그들이 왜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고 다수가 무당층이 되었겠는가? 설마 그들이 단 몇 년 만에 보수화되었다고 생각하는가? 한 인간의 정치적 성향이 그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고 믿는가? 그도 아니라면 ‘기울어진 언론 지형’의 지속적인 편파보도로 그들이 속고 있기 때문인가? 그런 주장은 2017년과 2018년엔 공정하던 언론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단 말인데 정말 그런가? 글쎄, 지금 2030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 없이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들과의 동맹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미래 세대와의 지속적인 동맹을 모색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 퇴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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