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이란?

복음서는 같은 내용을 다루는 것 같은데도 다르고 어떤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있고 어떤 거는 누가복음에만 있으며 어떤 거는 요한복음에만 있다.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까지 해서 공관복음서, 요한복음은 4 복음서라고 한다. 왜 공관이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사역은 너무 비슷하다. 하는 일들이 요한복음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를 들어서 성전 무효화 사건을 두고는 세 복음서 전부 다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시점에 배치했는데 요한복음은 초반부에 있다. 혹시 예수님이 두 번 엎으신 것일까? 공관복음은 ‘세 복음서를 같이 펴놓고 함께 보다’ 라는 뜻이다. ‘공통된 관점으로 보다’라는 뜻이 아니다.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는 마가복음 

이 세 개 중에 어느 복음서가 제일 먼저 쓰였을까?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신학자의 노고 때문이다. 2000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은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첫 번째로 꼽힌 복음서 아닌가? 그러다가 계몽주의 이후에 역사가 학문의 주제가 되면서 20세기 들어와 ‘마가 우선설’이 확정됐다.  두 자료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맨 처음에 마가 자료가 있었다. AD 70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마태와 누가가 봤다. 마태와 누가는 일단 마가 자료를 보고 옮겨 쓴다. 문서를 보고 베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한자도 틀림없이 같았기 때문이다. 구전으로 들은 것을 그렇게 쓸 수 있겠는가?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 자료를 뺐더니

그런데 마태, 누가복음에서 마가복음 것을 뺐더니 또 마태,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을 모아봤는데 똑같은 게 또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마태, 누가가 마가 말고 또 베껴 쓴 원본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출처 또는 원천을 말하는 독일어의 Quelle에서 유래한 Q 자료가 그렇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45년에 이집트의 북부 나일강 서쪽 기슭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도마복음이 발견됐다. 도마복음은 놀랍게도 예수님 말씀 114개를 모아놓은 말씀 자료였어요. 도마복음도 Q 자료에 속한다.

마가 자료에도 Q 자료에도 없으면

자, 이제는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를 빼고Q자료도 빼자. 또 남은 게 있을까? 있었다.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가 대표적이다. 그런 것들을 마태 특수자료, 누가 특수자료라고 한다. 이것들로 해서 공관복음이 형성됐다고 보면 된다. 

뒤로 갈수록 배역이 줄어드는 세례 요한 

마가가 먼저, 마태, 누가가 다음,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저작된 것으로 우리는 알았다. 자, 그런데 복음서의 초기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을 보자,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단순히 기록돼 있다. 마
태복음은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 주는 것을 대단히 겁내 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나 백성이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는지를 애매하게 쓴다. 한마디로 말해 세례 요한이 베풀었는지 알 수 없다. 잘 보면 요한이 감옥에 가 있는 것으로 돼 있어서 예수님 세례와는 무관한
것처럼 읽히게 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어떤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놓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줬다는 말이 가타부타 없다. 예수에 관한 증언자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뒤로 갈수록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 즉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의 역할과 권위를 축소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세례받는 게 모양새가 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주인공이어야 하잖은가?

요세푸스는 예수를 어떻게 기억하나?

그런데 비슷한 시기 역사 저술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예수와 세례 요한 중 요한의 세력이 더 크다고 말했다. 예수의 전기와 관련해서 교차 검증할 수 있는 문헌은 요세푸스 정도인데 참고로 그의 글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요세푸스 눈에 예수 운동 세력은 유대교의 한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종파였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전 세계적 종교 그리스도교가 된 것 아니겠나? 

세례요한 전사(前史)

사도행전에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지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성령 세례는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18장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의 언급이 그렇다. 이는 그리스 땅에도 세례요한이 죽은 지 70~80년 후에도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세례요한 운동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에 퍼져갔다. 물론 세례요한이 잡히고 처형당했을 땐 그의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신했다. 이 와중에 세례요한 제자 중 일부가 예수님에게 갔다. 안드레가 가버나움에 있는 형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만나게 함으로써. 세례요한은 실로 당대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외세에 의해 무너진 유일신 신앙

1세기 유대인의 공통적인 신앙이 있었다. 첫 번째가 유일신이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는 안 계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의 계명을 내 온 삶에서 구현하며 살리라’ 이것이 유대교만의 신앙고백이다. 당시 다른 종교는 다신교였다. 유대인에 있어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로 봤을 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윤리적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계명이다. 이중 종교적 계명은 일 년에 세 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은 성전에 가야 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해서 칠칠절은 모세가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은 걸
기념해서 그다음에 초막절은 광야에서 추수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때 성전에 가서 제사 지내며 자기 죄를 다 지운다. 그러다가 그리스가 세계를 제패한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 땅에도 유입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도 나오지만, 헬레니즘은 곧 다신교이다. 유일신 신앙을 가
진 유대 사람은 크게 혼란을 겪는다. 다만 기득권 귀족은 금방 거기에 동화된다. 

헤롯은 어떻게 본봉왕이 됐나

여기서 잠시 헤롯의 역사를 짚어본다. 헬레니즘 시대는 명목상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 아시리아, 레반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그리고 고레스왕의 나라 페르시아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부 지역,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까지 장악한 이후이다. 알렉산더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는다. 다만 임종 당시 후계자로 ‘가장 강한 자’를 지목했다. 당시 그 후보감은 네 개 왕조였는데 각자의 길을 갔다. 마지막에는 헬레니즘 왕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정도가 남았는데 이 나라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다. 유대에는 폼페이오스 장군이 팔레스타인에 쳐들어왔는데 그때 당시 유대 정권은 힐카누스라고 하는 왕이었다.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왕만이 아니라 2,000명 정도가 학살당한다. 그들은 유대인의 자존심인 성전마저 짓밟는다. 가증한 이방 신을 설치한다. 그렇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복속하면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이어간다. 방식은 이러했다. 거점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정점으로 해서 주변 지역 촌락의 모든 것을 빨아먹는 식으로. 거기에 빌붙은 자가 바로 헤롯이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젤롯당

상황이 이러하니 유일신 신앙을 섬기던 유대인들이 괴로웠다. ‘앞으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는가’를 고민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동조한 네 개 파가 있었다. 우선 사두개파. ‘성전은 지켜야 한다’ 라는 쪽인데 대대로 성전 기득권으로 살아온 귀족 관료이다. 제사장 그룹도 사독 가문에서 나왔다. 앞서 성전 기득권이라고 했다. 타협을 걸어오면 정치적으로 타협할 DNA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 말고 평민 처지에서 성전 아닌 율법지킴으로써 하나님 믿는 신앙을 잘 지키는 자는 쪽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다. 밑바닥으로부터의 지지가 상당했다. 그런데 그것도 완전하지 않다, 참 신앙인이라면 로마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진짜 주님은 하나님 한 분이지 로마 황제는 우리의 주님일 수 없다는 뜻의 열심당 즉 젤롯당이 있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암살도 하고 반란도 일으키자는 무장 혁명론자들이었다.

혜성같이 등장한 세례요한

그런데 여기에 세례요한이 혜성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 사두개 사람들이 세례 요한한테 가서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었다. 세례요한의 가장 큰 특징은 뭐냐 하면 누가·요한복음에서 말한 대로 제사장 집안 출신이다. 실로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은 그들이 갈망했던 정치적 메시아가 세례요한 당신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유대교 갱신을 표방하지만 실은 메시아가 오셔서 다 뒤집어엎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엘리야가 다시 온다’ 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 온다’ 라는 말이 서슴 없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그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낮췄다.

세례요한 왜 죽었나?

세례요한은 예언자이다. 그런데 세례요한 아니고도 800년 전부터 계속하고 있었다. 예언자 누구라도 ‘하나님이 오신다’라고 그 얘기를 수없이 했는데 세례요한은 이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다른 예언자에게 ‘하나님이 오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한테 잘보이고 그들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세례였다. 

새로운 길 ‘세례’ 

한 번 물에 푹 담갔다가 싹 씻고 나면 끝인 세례(침례)는 왜 할까? 그전에 이와 비슷한 예전이 있었다. 바로 정결 의식이었다. 씻는 것에서는 같았다. 이는 주로 성전에서 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처럼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오셨는데 무엇을 해야 하느냐,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동안 자신이 잘못 살았고, 앞으로 오실 주님 맞이하는 자로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표는 세례받는 것이었다. 어디서든지 와서 조건 없이 푹 담그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에세네파에서도 정결 의식을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일 년 동안 수업받아야 했다. 세례요한은 그냥 하면 되는 것이었다. 신분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니 엄청 많이 몰렸다.
세례요한은 이제 하나님이 오셨을 때 세례받은 사람을 모아 의의 군대를 만들어 마지막 전쟁에서 다 자기네 편으로 삼으실 것을 설파했다. 이 모든 행동은 성전 즉 종교 기득권자를 불편하게 했다. 속죄는 성전의 권한이었는데 세례요한 주장에 따르면 이제 다 필요없게 된 것이다.

세례요한이 불편했던 헤롯 안티파스

본봉 왕 헤롯 안티파스의 미움을 샀다. 세례요한은 헤롯하고 적대 관계였다. 성경에 따르면 헤롯은 형 필립의 아내이며 동시에 조카이기도 했던 헤로디아를 율법을 어기면서 아내로 삼은 것으로 돼 있다. 세례요한이 이를 참지 않고 비난하니까 헤롯이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생일소원을 들어주면서 세례요한을 참수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건 지어낸 이야기로 봐야 하고, 세례요한 죽음의 진실은 따로 있다.
세례요한이 정치적으로 헤롯에게 위협이 됐다.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서쪽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와야 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되돌아간다. 강을 건넌다는 고대에서 출애굽을 상징한다. 억압의 세력에서 건너왔다가 다시 간다는 것은 여호수아처럼 진격하러 가는 것이다. 즉, 무력 저항의 상징적 행위다. 그래서 헤롯은 반란의 기운으로 느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처단한다. 

예수의 증인된 세례요한

세례요한의 운동은 당시 제사장 그룹을 비판하고 정치적으로는 헤롯도 비판하고 그러면서 곧 ‘하나님이 곧 오신다’라고 하면서 율법이나 성전에 의해 삶이 고단했던 백성에게 아주 편안하게 하나님을 맞을 수 있게 했던 운동이다. 예수님은 그 운동에 함께 하시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죽는다. 세례요한 제자는 모르겠으나 복음서를 쓴 사람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세례요한을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메시아를 위한 길을 연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요한복음에 가면 증언자로 축소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 운동의 뒤를 이어 성전을 비판하고 당시 권력과 각을 세우며 가난한 자들과 같이했다는 걸 보여준다. 마가복음에서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취하고 권력을 쥔 자들이 기득권을 누리며 얼마나 지저분하게 행동하는지 보여 주면서 민중과 함께 벌이는 오병이어 잔치를 대조한다. 그리고 민중의 지도자인 세례요한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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