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시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는 이야기는 세 복음서에 다 있습니다. (마가복음서 1장 12~13절, 마태복음서 4장 1~11절, 누가복음서 4장 1~13절)

광야의 시험 그리고 역사성

‘예수 세미나’가 도마복음까지 포함한 다섯개 복음서 중 예수님이 실제 했을 것으로 보이는 말씀 구절을 빨간색으로 칠했다고 했잖아요. 말씀만이 아니라 행동도 그렇게 했어요.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았던 것이 여기에 해당했지요. 오늘 시험받는 부분은 회색이다. 회색은 역사적인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공생애 전 예수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았는가, 이 질문에 앞서 우리는 40에 주목해야 한다. 노아가 방주의 문을 닫은 이후로 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렸다. 히브리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맸다.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40년 동안 다스렸으니 제위 연한이 그러했다. 40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역사적으로 있었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이 이야기가 세 복음서에 모두 들어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마가는 두 줄, 마태복음은 상세히 

그런데 예수님 광야 시험에서 마가복음은 고작 두 절이다. 사탄에게 시험받은 것만 거론된다. 그런데 40일 동안 들짐승도 있었고, 천사도 시중들었다고 하고, 세 가지 유혹받았다고 하는데 마태하고 누가복음은 상세히 다뤘다.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서의 90%가 들어가 있고 누가 복음서에는 50%가 들어갔다. 그런데 마가에 없고, 마태 누가에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Q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러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왜 사탄에게 시험받게 하시는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의 체험을 했는데 그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예요. 그러할 때 사탄으로 표현되는 갖가지 유혹과 시련을 겪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세 가지 유혹은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라는 말로 시작해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 산에서 ‘나에게 경배하라’로 이어진다. 누가복음에서는 산 이야기가 빠진다. 우리도 유혹받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생길 모든 시련과 유혹 앞에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삼으면서 평정심을 가질 것인가, 이게 삶의 숙제로 남는다. 예수님도 어찌 보면 인간이다. 내면의 갈등도 장착하고 세상에서 살았다. 이럴 때 갖가지 시련과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과제로 안고 살았다.

광야라는 장소의 신성함

지금 이 현장은 광야이다. 스스로와 싸워야 한다. 모든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과 상대할 때 광야로 나갔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만나주셨다. 출애굽으로 해서 가나안땅에 가기까지 히브리인이 어디서 시험받았나? 광야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그 시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반면 예수님은 이겨내셨다. 예수님 광야의 이야기는 바로 모세의 지휘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은 이야기를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배고팠다. 또 물을 못 마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마라의 단물로 채워주셨다. 예수님은 그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방의 길에 나선 이스라엘 사람들은 황소를 섬겼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하라고 한다. 묘하게 겹친다. 불확실성 앞에 자기를 구원하실 이를 망각해버린 히브리인과 달리 광야에 있으면서 온갖 들짐승의 위협을 받았기에 심령이 위축됐을 것이 매우 확실한 예수님은 이를 이겨내셨다.

인간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어쩌면 앞날을 예표한 것일 수 있겠다. 잡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잔을 내가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 그게 예수님이 겪은 가장 큰 시련이라고 볼 수 있다. 근처에 제자 세 명밖에 안 데리고 왔고 나머지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 예정된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 냐 말 것이냐 하는 그 엄청난 유혹과 시련과 고뇌 속에서 기도하셨다.

사탄의 시험 ① “세상 지배권을 주겠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세상의 지배권을 너한테 줄 테니까 나한테 절 하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서를 볼 때는 ‘터무니없는 유혹’ 같지만, 메시아로 추앙받는 예수로서는 로마 황제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는 혁명을 이루려 한다면 사탄을 이용해서라도 그 힘을 이용해서라도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편 2편 8절을 보면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왕 세우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사탄도 예수님께 그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예수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때마다 굴복했다. 땅의 권세를 얻기 위해서 지배권을 얻기 위해서 황소에게 절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 했다.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아들 됨’이 ‘세상 지배하는게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진짜 그의 아들다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하늘 권세는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잠시 마태복음이 쓰인 배경을 알아 야 한다. 때는 기원후 66년부터 74년까지 로마가 유대를 침공한 시기, 사실 70년쯤 완전히 장악되는데 다만 마사다라는 곳에서 소수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로마와 싸우려던 열혈당원의 욕망은?

유대 전쟁의 촉발점이 된 사람이 있었다. 열혈당원이다. 그들은 무력 즉 폭력으로 로마 황제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배하려 했다. 열혈당원을 메시아로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혁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마태복음 저자는 “폭력을 써서라도 세상을 뒤집어엎고 땅의 권세를 쥐어 주는 등 기적을 베풀어 주셔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진다. 실상은 “‘자기들 욕망을 몽땅 실현시켜줄 대상을 찾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다.

사탄의 시험 ② “빵을 주겠다”

다음 유혹은 배고픔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으신 중이다. 그래서 ‘돌로 빵을 만들라’라고 하는 것이다. 돌이 빵이 되는 것은 이치상 틀리지않다. 돌이 흙이 되고, 흙이 빵의 원료인 밀을 만든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매우 많이 소요된다. 사탄은 “돌로 아브라함 자손까지 만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인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빵정도는 해야지”라고 가정법 형식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나?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했다. ‘빵은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일 수 있지만은 빵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쉽게 당장 나한테 절실한 걸 찾는다. 그럴 때 물어야 할 게 있다. 이게 꼭 중요한 건가? 더 옳은 건가? 정말 핵심적인 것인가? 그래서 경제적 문제로만 모든걸 해결하면 다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욕구 이론에서 “생존 생리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반드시 그다음 단계로 소속감의 욕구 안전의 욕구를 추구하고 이게 또 해결되면 그다음 단계 자아 실현의 욕구 등 인정 욕구라든가 더 고차원적인 욕구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인간은 배부른 돼지로만 살 수가 없다. 흉중에 늘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말이다.

사탄의 시험 ③ “하나님 아들 인증하라”

자, 그리고 사탄은 이번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라고 한다. 사탄이 이젠 성경을 동원해 꼬신다. 이때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한다. 정말 뛰어 내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는가 안 받아주는가를 시험할 때, 받아주면 믿는게 진짜 신앙인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을 줄 알아야 한다. 돌아 보자. 한국 그리스도교 240년 특히 개신교 140년의 역사 중 기적을 경험하지 않고도 말씀으로만 하나님을 믿었던 한국 개신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기적 번영 좋아하면 샤머니즘과 다른 점 이?

예수님의 지엄 지존하심 이런 것들만 찬양하면서 그분의 고난의 과정을 지나치게 도 외시한 측면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고난당할 때만 하나님께 가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라고 했다. ‘나에게 기적을 일으켜 달라’ ‘나에게 번영하게 해달라’라고 해놓고 충족되지 않으면 교회와 등돌리는 것은 샤머니즘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다. 기복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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