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첫 마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마가복음 1장 14절에서 15절이다. “(세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누가복음도 읽어보자. 4장 14절~15절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온 지역에 도로 퍼졌다.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 두 가지 말씀 모두 예수님이 시험당하고 온 뒤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잡힌 뒤 갈릴리에 오셨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런 말이 없다. 때와 장소를 명시하는 마가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없다. 사실 누가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입고’ 오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마가복음서는 세례를 이미 받은 것으로 했다.

마태 마가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한 분’

탄생 이야기가 있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때 세례요한은 좀 멋쩍어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제가 세례를 당신에게 줍니까?’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즉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인데 세례요한도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임신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는데 이미 뱃속에 요한이 뛰놀고 있었다. 세례요한이 잡히고 나서야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말한 것이 마가인데 누가는 달랐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에 잡힌 이후에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것은 마가복음서이다.  세례요한이 잡히고 유대교 갱신 운동의 명맥은 예수님이 이어가시되 갈릴리에서 하신다. 마태복음 4장 12절에는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라고 돼 있다. 옛날 번역은 “갈릴리로 물러나셨다”라고 돼 있는데 이게 더 옳은 것 같다. 

갈릴리가 꼭 필요한 마가

반면 마가는 갈릴리로 작심하고 찾아오신 것이다. 특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있는 곳, 이방인의 낯선 땅이라고 불리는 곳, 그다음에 ‘땅의 사람들’ 즉 암 하레츠가 살았다고 하는 곳, 비옥한 토지를 가졌지만, 예수님 당시에 성전세를 내야 하고 헤롯 또 로마 황제에게도 뺏겨야 하는 삼중 착취 속에서 늘 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공간이 필요했다.
다시 예수의 공생애 일성을 주목하자. 우선 “때가 찼다”를 보자. ‘때’는 그리스어로 크로노스가 있고 카이로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그냥 연대기적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 결정적 순간이다. 예수님이 “때가 찼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충분한 시간이 무르익었다’라는 뜻이다. 즉 카이로스이다. 

공생애 첫 발언, 이런 뜻이다

마가복음은 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했다. 이는 이미 온 것이기도 하고 아직 안 온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존에 살던 삶하고 똑같이 살아야 할까? 아니다. 
그리고 “회개하라”라고 말한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까지 살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돌이키라는 뜻이다. 완전히 새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 세상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옛날 방식대로 산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복음을 믿어라”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 옆에 계시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고 두려워하는가 질문받는 세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안에 사로잡혀 이 불안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없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근심이라고 한다. 정말 하나님이 오신다면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기쁨의 소식이고 그렇다면 나는 들떠 살 것이다.  

모든 종교학자가 종교가 왜 발생했는지 질문을 할 때 많은 대답은 죽음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고독이다. 그런데 하나님 만나는 삶은 행복이고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고 살아보자 하는 게 예수님 생각이었다.  “믿는다면 사랑하는 것”이라고 키르케고르가 얘기했다. 예수님이 “복음을 믿어라”라고 할 때는 ‘내가 바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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