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에 피어나는 봄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내일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서 본 자들에게 있어 삶에 대한 애착은 트라우마만큼 지독한 것일까. 광주 서정교회 담임을 맡고있는 장헌권 목사는 40여년 세월을 부채감으로 살았다. 그것이 장 목사가 광주에서 민주, 평화, 인권을 외치는 어디서건 최전방에는 서는 이유다. 봄날의 따스함마저 삼켜버린 오월 광주는 부활하며 다시 일어서는 봄이라 믿는 장헌권 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오월 광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광주 서정교회 장헌권 목사가 부모님을 따라 진주에서 광주로 이사 올 당시 나이는 열넷.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노라 다짐하며 신학생이 된 그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의 비통함은 광주 시민 그 누구도 비켜 갈 수 없었다.

그는 전남대 학생이었던 동생(장헌일 목사, 생명나무숲교회)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도청 앞 상무관에 놓여있던 주검들의 이름표를 일일이 확인했던 기억을 소환했다. 비슷한 이름표를 보고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확인한 얼굴은 동생이 아니었다.

당시 장 목사가 느껴야 할 감정은 안도감 뿐은 아니었을 터.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마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뒤엉켰다. 이후 그의 삶은 누구보다 투쟁적이다. 엄혹했던 시절, 학내에서 소수라도 모여 광주민중항쟁으로 숨진 이들에 대한 추모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기독병원 원장을 지내던 고() 찰스 헌트리 선교사가 촬영한 당시 사진을 직접 인화해 81년 전시회를 열었다. 헌트리 선교사가 남긴 필름 속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환자들의 얼굴은 당시 진상을 그 무엇보다 정확히 알려주었다.

헌트리 선교사가 기독병원 안에서 찍었던 사진이 병원에서 일하는 신학생 직원을 통해 제 손에 전달됐어요. 그 필름을 몰래 가지고 있다가 81년도에 사진 30여 장은 인화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주에서도 하려고 했는데 경찰에 막혀서 못했죠. 더 활발히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사진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팩트를 알려주는 것이어서 진실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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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장헌권 목사 제공)

그는 서광주교회 전도사로 재직하던 81527일 광주민중항생 1주기 추모식에서는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81527일이란 글자가 또렷이 남은 낡은 테이프처럼 광주의 아픔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당시 전도사였던 장 목사의 설교는 김준태 시인의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로 시작했다.

전남고등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김준태 시인의 시는 당시 상황을 매우 잘 대변했어요. 당시 신문에는 10분의 1이나 실렸을까, 많이 삭제가 됐고, 구하기도 힘들었는데 어렵게 전문을 다 구해서 그 시를 읽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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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헌권 목사 제공)

 

요한복음 18:28-40을 본문으로 한 그의 설교는 힘이 있었다. 가야바 법정에 선 예수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묻는 빌라도에게 당신이 나를 왕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풍설로 들었는가. 내가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하셨던 것처럼 광주의 현실을 듣는 것이 진리를 듣는 것이라는 선포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그리고 교회가 이러한 일에 침묵하지 말고, 진리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외치는 내용이었다. 약자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고, 아벨의 피 소리가 하나님에게 전달돼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의 외침은 십자가의 삶을 살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물론 장 목사는 이후로 외롭고 피로한 삶을 살아야 했다. 형사들의 감시 속에서 불안·공포와 싸워야 했고, 결국 섬기던 교회를 나와야 했다. 가족들의 이해와 지지도 100%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했던 길. 앞선 간 이들의 발자국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도 14일에 선배 문용동 전도사님의 순직자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문 전도사님은 호남신학대학교에 선배로 상무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80518일 주일 예배 후 귀가 길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구타당해 피흘리는 모습을 보고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상자 구호와 헌혈운동 등으로 활동하다가 527일 새벽 계엄군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또 한신대 학생으로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와 항쟁에 뛰어든 류동운 학생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가 성결교 목사님이신데 광주에 가지 말라고 말리니까 아버지는 설교시간에 정의를 위해서 살라고 얘기하시면서 나를 왜 막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시 현장을 보고 언론 왜곡에 맞서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유인물을 뿌리면서 투신한 김의기 서강대학교 학생,이런 분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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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헌권 목사)

장 목사는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독재에 항거하다 쓰러져 간 이들의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 목사가 약자의 인권을 위해, 생명을 위해, 평화를 위해 쉼 없이 달려가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에선 여전한 망언과 거짓선동으로 오월 광주는 폄훼되고 있다.

김순례 자유한국당 최고의원은 5·18 유공자를 “괴물 집단”이라고 매도했고, 김진태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은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을 국회에 초청해 공청회를 주최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당 차원의 징계는 경고 또는 당원권 정지 3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고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징계 처리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장 목사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5.18 역사를 왜곡하고 망언하는 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5.18역사왜곡 처벌법을 상정해서 국회에서 처벌해야 하는데 상정도 못하고 있고 작년에 5.18진상조사위원회를 9월에 출범해야 했는데 한국당에 막혀 그것도 꾸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올해 39주년맞아 518일에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월 광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따사로운 봄바람마저 서러운 광주에서 오늘도 씨를 뿌린다. 차가운 겨울이 가면 꽃이 피는 봄이 오듯, 거친 세월 이겨낸 광주의 부활을 믿으면서 말이다. 장 목사는 다시 시 한 편을 꺼내 들었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 성경에 밑줄 긋는 것이 아닌, 생활에 밑줄 그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교회에서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정의와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받고 사는 은혜가 너무 큰데 그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번영, 출세, 성공 등의 맘몬과 자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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