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쟁 당시 ‘좌익 검사’로 몰려 처형당한 박찬길 검사

[평화나무 정병진 시민기자]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여순71주년 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서울추모문화제 및 행사추진위원회와 여순항쟁 서울유족회 주최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19.10.21 (사진=연합뉴스)

올해로 여순항쟁 72주기를 맞았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제주 4.3 항쟁과 달리 여순항쟁은 여태 정부의 공식 사과이나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없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승만 정권이 ‘반란사건’으로 규정하고 봉기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토벌과 학살을 한 직후 국가보안법까지 만들어 여순항쟁에 대한 침묵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여순항쟁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특히 보수 기독교계에 가장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사랑의 성자’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 사연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순항쟁 때 좌익 학생들에게 두 아들을 잃고 그 살해에 가담한 학생을 양자로 삼았다. 이 사건은 영화나 연극, 오페라 등으로 만들어져 최근까지도 상연되곤 한다. 하지만 당시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만 있었던 건 물론 아니다. 

군인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훨씬 많았다는 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등의 조사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희생자는 어림잡아 무려 1만 5천여 명에 이르는데 95%가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군경 토벌대는 봉기에 전혀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마저 아무런 조사나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집단 학살하였다. 대표적인 그 한 사례를 알아보자. 

1948년 10월 24일 아침, 순천 매곡동 북국민학교에선 경찰 토벌대가 이른바 ‘부역자 색출과 즉결처리’라는 명분으로 21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 희생자 중에는 나이 어린 중학생과 광주지검 순천지원 검사, 검찰 서기도 있었다. 희생당한 인물 중에 그나마 널리 알려진 사람은 현직 검사였던 박찬길 씨(당시 38세)였다. 

그는 봉기군이 순천을 장악했을 때 인민재판 재판장[혹은 배석 판사]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당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였다. 당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는 숱하게 많지만, 박 검사의 죽음은 여순항쟁 당시 경찰 토벌대가 얼마나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았는지 웅변한다. 

박찬길은 황해도 출신이고 고당 조만식 선생의 제자이며 숭의전문학교와 일본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검사가 되어 순천지검 차장 검사로 재직 중이었다. 광주 양림정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총회 회의록(1936년 9월 11일)을 살펴보면 학무부의 대비생(貸費生)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대비생(貸費生)은 넓게 보면 ‘장학생’의 일종이라 할 수 있지만 개념은 조금 다르다. 

그 자격을 보면 신앙이 독실한 세례 교인으로서 총회가 인정하는 전문학교와 대학 본과에 입학한 학생,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자부담하기 불가능한 자, 35세 미만의 나이 등 6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렇게 대비생에 뽑힌 학생들에게 총회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학비를 무이자로 빌려주고 수혜 학생은 졸업 후 6개월 이내부터 빌린 학비를 갚아 나가야 한다.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일본 중앙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박찬길에게 30원”씩 지급한다고 돼 있다. 1936년 당시 ‘월 30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그 시대에는 일본 유학생 학비로 그럭저럭 충분했던 거 같다. 참고로 1930년 쌀 한 가마(80kg) 가격이 13원이었다. 박찬길은 황해 노회장 추천과 두 명의 보증인을 세워 대비생이 되었다. 이는 그가 신앙이 돈독해 노회에서도 추천할만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찬길 검사의 숭의전문학교 1년 후배이자 초대 군종감을 지낸 김형도 목사는 그의 회고록 <복의 근원>에서 박 검사에 대해 독실한 기독교이라 말하고 그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며 무척 애석해한다. 김형도 목사도 우연찮게 여수에 왔다가 여순항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월간 <기독교 생활가정> 창간호(1948. 12)에 알린 바 있다. 

 

여순항쟁 당시 순천 출신 국회의원이자 장로였던 황두연 씨도 박찬길 검사처럼 처형당할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자기 십자가 지고 따르라>에서 여수 14 연대 반란 사실을 박찬길 검사가 알려줘 피신하였음을 말하면서 박 검사가 무고히 처형당했음을 증언한다.

박찬길 검사는 “인민재판 배석 판사 노릇을 했다”는 누명으로 즉결 처형을 당하기 전 경찰에 의해 이른바 ‘적구(赤狗) 검사’로 지목돼 있었다. 여순항쟁이 발생한 이듬해 시월 법무부 장관 권승렬이 국회에서 발언한 속기록에 따르면, 여순항쟁 직전 박 검사는 살인을 저지른 한 경찰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그 경찰은 산속으로 도망치는 좌익 인사를 뒤쫓다가 총을 쐈는데, 한 사람이 다리를 맞고 쓰러지자 한 방을 더 쏘아 사살하였다. 수사를 해 보니 죽은 사람은 경찰이 추격하던 좌익 인사가 아닌 나무꾼이었다. 이 사건을 맡은 박 검사는 해당 경찰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10년 형을 구형하였고 이 사건 이후 경찰들은 박 검사를 ‘좌익 검사’로 낙인찍었다.

그런데 여순항쟁이 터지자 경찰은 은신했다가 토벌대가 진압한 뒤 나온 박 검사를 체포해 심하게 구타하고 “인민재판 때 배석 판사 노릇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총살하였다. 박 검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국회의원들의 지적과 유족의 탄원 등이 이어지자 군·검·경 합동 수사가 진행돼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하지만 박 검사 처형을 주도한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 총경과 경찰들에 대해 책임을 묻고 처벌하려던 즈음, 경찰들이 크게 반발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 사건은 유야무야 덮이고 말았다고 한다. 

박찬길 검사의 죽음은 그나마 당국의 진상조사로 억울한 누명이 밝혀진 사례에 속한다. 하지만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무고히 죽어간 무수한 민간인은 여태 신원(伸寃)의 날을 고대하고 있다. 

* 참고한 자료 / 주철희, <불량 국민들>(booklab, 2013),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흐름, 2017), 황두연, <자기 십자가 지고 따르라>(목회자료사, 1994), 김형도, <복의 근원>(한국기독교문학연구소, 1979), <1949년 10월 5일 국회임시회의 속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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