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전공자로서 필자는 중요한 선가가 다가올 때마다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이번 선거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고민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가끔 이런 식의 질문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소위 ‘전문가’에 의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 제기되기도 한다. 정치가 현실을 바꾸는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대상인 ‘왜곡된 현실’은 한두 번의 선거로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정치적 현실은 무엇인가?

첫째, 혐오와 증오의 정치이다. ‘자기편’과 ‘진영’의 결집은 정치의 기본이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를 부정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자기편의 결집이 반드시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키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강화된 정치적 극단주의는 혐오와 증오를 동력으로 하며, 그 주된 대상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20세기의 불행한 역사를 통해 혐오와 증오의 정치가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필자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정치적 영역에서 혐오와 증오의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간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한 계명(막 12:33)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온유함”(딛 3:2)은 혐오와 증오에 기초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그리스도인도 사회적 문제이자 왜곡된 정치 도구라고 생각하는 혐오와 증오의 정치를 교회가 용납한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소금과 빛”(마 5:13~16)의 역할은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둘째, 정치적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과잉 대표 현상이다. 혐오와 증오의 정치는 정치적 극단주의의 핵심 요소이다. 한국교회는 명목상으로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기독교 극우 세력과 같은 정치적 극단주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근본주의 교회가 과잉 대표하고 있고 근본주의 교회는 극우 정치 세력과 같은 내적 기제에 의해 움직이는 만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교회는 몰락의 위기에 서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의 일시적인 퇴행에도 시민사회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지만, 근본주의 신학이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심리적 안정과 개인 윤리만을 강조하며 상당수의 목회자는 양적 성장과 전근대적 가치관에 집착하고 있다. 이대로 과잉 대표되고 있는 근본주의 교회의 잘못된 행태를 용납할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밴드왜건효과로 인해 한국교회는 더욱 극우화할 것이다.

한국 보수 교회의 극우화가 가속화될수록 젠더 문제와 같은 사회적 주제는 외면받을 것이고 교회 세습과 사유화와 같은 교회의 문제는 심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극우 세력은 한국교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이자 신앙적 문제이다. 교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결국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마 5:13).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정치적 지향

이런 왜곡된 현실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정치적 지향을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기독교적 결정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사상도, 체계도,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상황 속에서 인식하고 고수해야 하는 방향과 노선”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향과 노선은 현실의 모순을 강화하거나 왜곡된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정치적 방향과 노선이 옳다면, 독재와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의견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정치적 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교회 내 공론장을 통해 정치신학과 정치윤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맹목적인 추종에 익숙한 교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개인적인 정치적 취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문제에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이 계속될 것이다. 보수 교회의 극우화를 막지 못하면 ‘태극기부대’와 같은 극우 기독교 세력이 한국교회를 과잉 대표할 것이며 이는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왜곡할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현실 앞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이번 총선에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정책적인 방향과 노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정의를 강화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경제정의 강화 및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단순히 경제 문제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현재의 정치적 극단주의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냉전 시대의 모순으로 발생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노동자층과 저소득층에게 떠넘김으로써 손쉽게 해결하려 했다. 빈부의 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안전망에 구멍이 뚫리면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한 만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성 확대와 같이 사회적 갈등을 약화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경제정의를 강화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둘째, 기후정의와 생태 문명을 바로 정립할 수 있는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생태 위기의 일종인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기후정의와 생태 문명을 바로 정립하지 못할 경우, 인류가 거대한 생존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하였다. 사실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한 이윤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을 막무가내로 진행하였다.

교회는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님을 고백하며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무작정 파괴하는 정책들을 거부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 교회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개발 이데올로기에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필자는 생태학적 대안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경제적 양극화와 생태 위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생태학적 공공성의 문제를 성찰해야 한다.

셋째, 남북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악화일로에 있는 남북 관계는 윤석열 정권의 반민주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만약 한국의 시민사회가 권력의 사유화와 냉전 이데올로기의 정당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과거 냉전 시대에 민주주의 체제가 손상되었던 역사적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진정 “화평케 하는” 역할(마 5:9)을 감당하려면 이번 총선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넷째, 선거제도 개선, 지방분권 및 지방 자치 강화 등을 위한 정치개혁 정책을 지향해야 한다. 87년 체제의 등장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하지만 누가 혹은 어떤 사회적 집단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발전과 후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완전한 연동형 선거제를 위한 제도 개선은 당면한 과제이다. 2024년 총선의 선거제인 준연동형은 병립형에 비해 한 걸음 나아간 제도이지만, ‘위성 정당’의 난립을 막을 수 없다. 또한 지방 소멸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방분권 및 지방 자치 강화를 위한 정치개혁은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한국교회, ‘정치적 시민 의식’ 자리 잡았는지 관심 가져야

물론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제도 개혁과 시민 의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가야 할 문제이다. 체제의 정립이나 제도 개혁이 곧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기 전에 시민사회 영역보다 더 신중하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시민 의식’이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2024년 총선 이후에도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왜곡된 현실과 실현해야 할 정책적 지향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실천적 과제는 시민과 MZ세대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과거와 같이 절대 빈곤의 시대나 군사 독재 시대에는 교회가 직접 사회적 도움을 나누고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정치적 영역에서 저항하고 행동해야 했다. 당시에는 교육이나 시민 의식에 있어 편차가 컸던 만큼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는 이끄는 역할이 중요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지만, 87년 체제의 등장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적인 가치가 자리를 잡았고 권력의 분산이나 사회적 헤게모니의 분화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젠 교회나 교회 지도자와 같은 특정 집단만의 영향력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좀 더 적극적으로 시민을, 특히 MZ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왜곡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정치적 변화는 시민의 적극적인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 이미 87년 체제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만큼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위해 MZ세대의 도움과 협력이 요청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신학적 정당성의 문제뿐 아니라 현실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통과 이해를 통해 MZ세대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왜곡된 현실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MZ세대의 이해관계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이러한 현실은 기존의 사회적 인식과 기득권층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쉽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그 차이가 더 심화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2021년 국세청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50%는 평균 연봉 3,000만 원 이하이고 70%는 4,500만 원 이하이다. 근데 상위 0.1%는 9억 5천만 원이 넘으며, 상위 6%는 연봉 1억이 넘는다. 하지만 한 달 월급이 200만 원도 안 되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된다. 이런 나라에서 하위 30%가 상위 0.1%의 재산세와 기업의 법인세를 걱정해 주는 정치적 형국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경우, 냉전 시대 프로파간다의 내면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주요 요인이라면, MZ세대는 매스 미디어와 뉴미디어를 통해 반복해서 접하는 상위 0.1%의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인 것 같다. 직시하기엔 너무 가혹한 현실과 허상이지만 쉽게 도피할 수 있는 동경 사이에서 후자가 힘을 얻고 있다.

물론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시민사회는 새롭게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노력만으로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힘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는 교회라면 당연히 왜곡된 사회적 가치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 가치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단지 시대가 변화한 만큼 신앙적(혹은 신학적) 당위성에 기초한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설득과 모범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MZ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소통과 이해를 통해 설득하려는 자세는 오늘날 기독교 사회운동에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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