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협조해 달라는 정부에 '종교탄압' 주장한 예장합동 총회장
민주화 운동 언급이 기장 목사에게 기가막힌 이유

한신대 신학대학원 교정에서 각계인사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 '민주화운동 대부' 故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 1994.1.22 (사진=연합뉴스)

 

[평화나무 권지연 기자] 일제강점기에 이어 미군정,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기생하며 세를 확장해 온 흑역사를 망각한 것일까.

한 보수 교단 총회장이 정부의 방역협조 요청에 ‘종교탄압’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민주화운동’ 당시를 거론해 공분을 사고 있다. 

예장합동 교단(총회장 김종준 목사)은 21일 ‘전국교회 예배당 출입 확인서 시행의 건’ 공문을 교단 산하 소속 교회들에 발송했다. 

예장합동은 공문을 통해 “코로나19 사태에 긴급행정명령권을 발동하여 이번 주일예배에 대한 지도, 감독 차원에서 일부 공무원들이 강제적으로 예배당을 진입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것은 종교탄압이요, 신성모독이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심각한 훼손의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당시 수배령에 의해 도피하여 잠입한 현행범(당시의 보안법 등에 의거)이 명동성당에 수십 명이 칩거할 때조차도 검찰과 경찰 등 일체의 공무원이 체포·구금·감시·조사를 위해서 출입하고자 했을 때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제의 침략과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이승만의 독재를 찬양했으며 군사독재자들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까지 열면서 군부독재에 기생했던 흑역사를 망각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부독재ㆍ군사독재 시절 보수 개신교 한 일은?

해방 후 이승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초대 대통령으로 등극하면서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며 종교와 정치를 일체화했다. 미군정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남한에 정착한 북한 개신교인들은 반공을 매개로 정권과 유착관계를 형성해 나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온갖 특권을 누렸고, 교회는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45년 당시 10만에서 15만명 정도에 불과했던 남한 개신교인 수가 1천만명에 육박하는 한국 최대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그 이면에는 부끄러운 역사가 뒤따랐다. ‘반공’으로 똘똘 뭉친 보수교회는 기독교 국가를 표방한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그의 영구집권을 위해 개헌과 3ㆍ15 부정선거에 발 벗고 나섰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났으나 보수 개신교는 여전히 지배계급에 순응하며 특권을 놓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한경직, 김활란,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 애썼다. 특히 김장환 목사는 미국 전역을 수차례 방문하며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설교와 강연을 했다. 

독재에 맞선 눈물겨운 움직임도 물론 있었다. 1969년 박정희가 3선개헌을 시도하자, 목사 김재준, 박형규와 사상가 함석헌 등 에큐메니컬 진영의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한국기독교교회혐의회(NCCK)는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교회의 성명’을 발표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NCCK를 중심으로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소위 88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처럼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설 것을 다짐하는 움직임이 거세지자 보수 성향의 원로 목사들이 박정희 정권 비호에 앞장섰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전광훈 씨가 사유화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출발이다. 

이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에서는 백남조 총신대 이사장을 중심으로 삼선개헌에 대한 지지성명을 54회 총회 이름으로 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합동 교단은 당시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백남조 장로(백홍섬유)와 김인득 장로(벽산그룹)와 같은 기독교인 자본가들을 총신대 이사회로 끌어들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무인가로 운영되던 총신대학교는 1967년 설립 인가를 받게 된다. 당시 총신의 교장으로 시무하며 교무부와 긴밀히 협조를 맺고 대학인가를 위해 노력하던 박형룡 목사는 ‘삼선개헌 지지’는 학교를 위한 불가피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현에 관한 <개헌문제와 양심 자유선언>이라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개헌문제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자’로 추어올리며 군부독재 정권을 옹호했다. 

합동교단의 기관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교단 자체 내의 근래에 일들을 열거하여 자성해 보고자 한다. 오늘의 보수교회는 너무나도 현실과 잘 타협한다. (중략) 본 교단 저명인사들이 개헌한에 서명나열을 하고 얻은 것은 총신대학부 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 사건 자체를 예의 비판했던가. 아니면 내가 얻을 것만 크게 보고 그 결과적 영향을 덜 생각하지는 안 했는가. 다시 말해서 많은 교인들이 자유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어른들이 먼저 찬성서명을 선포해놓았으니 이것이 독재적 선포였던가 아니면 자체의 분열의 선포였던가

 박형룡 목사는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고 박해할 때는 저항해야 하나, 정치 또는 인권의 문제는 세속의 문제로 치부하고 교회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히 독재 정권을 위한 나팔수를 자처했던 보수 교회를 정부가 탄압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반공사상으로 국민을 총화 단결시키기에 보수 개신교만큼 좋은 파트너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을 부각시키며 추앙한 것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논란거리다. 박 전 대통령은 현충사를 성역화하고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여기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데다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이라는 친일 논란을 무마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순신이 가진 반일 이미지를 통해 박정희의 친일 이미지를 희석하고, 이순신의 구국 영웅적 이미지를 통해 구 출신 인사의 집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 

그런데 합동교단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박형룡 목사는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충무공이야말로 죽도록 충성해 나라를 건지고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충성의 상징으로 이 민족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어 충성의 광채를 찬란히 비추어주는 이 민족의 태양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은 후대에 길이 남을 교훈을 남긴 것은 틀림이 없다. 그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요, 영웅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형룡 목사가 박정희 영웅화 작업을 위해 이순신 칭송에 협력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 역시 지울 길이 없다. 

'짐이 곧 국가'...독재자 찬양한 보수 개신교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망령이 한국개신교를 삼킨 것일까. 이들은 ‘국가’의 자리에 ‘독재자’를 앉혔다. 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를 필두로 1966년 박정희 정권을 위한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개신교계 거물 목사들이 모여 박정희를 위해 기도하며 그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김준곤 목사는 제1회 조찬기도회 때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하고, 2회 때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찬양했다. 군사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1976년 ‘대통령조찬기도회’의 명칭은 ‘국가조찬기도회’로 바뀌었고,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으나, 독재정권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기생은 계속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직후 8월 6일과 9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때 참석하였던 목사들의 명단은 한경직, 김준곤, 정진경, 조향록, 김지길, 문만필, 지원상, 유흥목, 이봉성, 신현균, 김창인, 장성철, 김신명, 박정근, 김용도, 김종식 등이다. 
이중 김창인은 예장합동에서 가장 큰 세를 자랑했던 충현교회 원로 목사다. 

당시 일부 진보 개신교계가 반발했으나, 주류를 이룬 보수교회들은 진보세력을 ‘좌익’, ‘빨갱이’로 몰아세우며 그 세를 키워갔다. 이들의 배후에 군사독재정권의 지원이 있었다는 점은 두말해야 잔소리다. 

 

'신사참배'로 저버린 신앙 양심, 참회는 없었다 

독재정권에 야합, 기생한 부끄러운 역사는 신사참배로 이미 저버린 신앙 양심에서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 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발언이다.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내용이 담긴 ‘긴급 동의안’은 이날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처럼 보수 장로교는 일제강점기에 국권을 침탈한 일본 천황에게 절하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제의 총칼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백번 이해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 앞장섰다. 교회들은 교회 종을 떼어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쓰라고 바쳤고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교회 헌금으로 헌납했다. 심지어는 교회를 통폐합한 후 교회 건물과 부지까지 일제에 상납했다. 예배 시간에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기미가요(일본국가)도 불렀다. 일제가 불편해할 모세오경(출애굽기) 등도 철저히 배제했다. 그러고도 해방 후 참회는 없었다.

보수 목사들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하며 신앙을 지킨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박형룡 목사나 주기철 목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사참배 반대는 항일운동 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신사참배 반대는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신앙적 이유가 컸다. 신사참배와 같은 신앙적 문제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했으나,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참여와 현실의 문제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들이 고난받는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말씀을 통한 위로가 전부였다. 

박형룡 목사는 1950년 한국전쟁은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등을 회개하지 않은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믿었다고 한다. 또 해방 후 친일에 반기를 들며 수감됐던 목회자들이 풀려나 따로 교단을 설립하면서 한 몸이었던 장로교는 1952년 찢어졌다.

 

로마서 13장의 망령에서 벗어났나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를 가로막았던 보수 개신교계 목사들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권세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다’는 로마스 13장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미친 운전자에게 핸들을 맡길 수 없다’며 히틀러에 대항했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며 반문재인 투쟁에 나선 전광훈 씨나 정부의 방역협조 요청에 ‘예배를 사수하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보수 개신교의 결기가 더욱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이유다. 

보수 개신교 목사들의 일관되지 않은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야 로마서 13장의 망령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반공을 무기삼아 일관된 모습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분석일 수 있겠다. 진보진영 개신교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고초를 당할 때 정권에 부역하며 단맛을 즐기던 보수교단에서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이유다. 여전히 회개나 반성이 없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육순종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성북교회)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같이 일침을 가했다. 

“적어도 교단장 이름으로 나오는 서신들에서 내가 거슬리는 것은 ‘군부독재시절에도’ ‘민주화운동시절에도’ '공권력이 교회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표현이다. 그들이 그 당시의 일을 제대로 아는지 묻고 싶다. 7-80년대 경찰이 수시로 교회를 드나들며 설교내용을 체크하고 설교 내용을 문제 삼던 일을 아는가. 그때 목회자와 교인들이 느꼈던 위협을 아는가. ‘송암교회 성소침탈 사건’을 아는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회 예배 이후 연행하러 온 경찰을 피해 다시 교회로 들어온 청년들을 체포하러 교회 유리창을 깨고 성전에 난입해서 기물을 파괴하고 목회자를 구타한 일을 아는가. 민주주의를 위해 단식 농성하던 목회자와 사회 인사들을 강제연행하기 위해 기독교회관 8.9층에 수백명의 사복경찰이 난입해서 이들을 연행한 사건을 아는가. 이런 일들이 성소침탈이고 신성모독이다. 그러니 제발 ‘군부독재시절에도’ ‘민주화운동시절에도’란 말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듣기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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